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 (문단 편집) == 상세 == 백성들은 이런 음해에 선동되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실드쳐줄 귀족들의 숫자가 적어지자[*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호해주겠다는 [[라파예트]] 후작 같은 이는 소수였다.] 1789년 10월 5일에는 성난 여성들이 대포까지 끌고 베르사유 궁궐로 쳐들어가서 왕비의 이름을 부르며 죽이자고 외쳐댔다.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진을 치고 공성전을 방불케하는 기세로 왕가에 요구했다. 라파예트 후작이 궁궐 경비병과는 따로 [[왕족]]들을 보호하려고 치안 유지 병력을 투입했는데, 날이 저물어가며 이 병력은 아줌마들과 결국 부대끼며 술도 마시고 동화되어 갔으니, 만에 하나 유혈 사태가 터지더라도 이들을 향해 발포할 마음이 사라졌다. 아줌마들은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꾸려서, [[루이 16세]]와 만나서 왕의 개인 [[아파트]]에서 담판을 했다. 그들은 왕비를 증오할수록 왕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에 사로잡혔고, 막상 루이 16세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되자 [[프랑스 왕국|프랑스]] 국왕의 위엄에 압도되어 1명은 기절해서 쓰러질 정도였다. 루이 16세가 "왕가의 부엌 창고에서 [[음식]]을 배고픈 시민들에게 나눠주라"고 [[명령]]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대표단이 돌아오고, [[루이 16세]]가 "[[프랑스 파리|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한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고, 음식도 배급되자, 군중은 [[만세]]를 외치고 사태는 잠잠해지는 듯했다. 경비병들도 날이 저물어 가고 이 새로운 소식에 안도하고 [[경비]]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은 해산하고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아줌마들 사이에서 "멍청한 대표단 년들은 말뿐인 약속을 쉽사리 믿고, 한 건 했다고 자축하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에 곧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마리 앙투아네트|요망한 오스트리아 년]]이 우리 착한 임금님을 꼬셔서 약속을 어기도록 설득할 거다"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나돌아 아줌마들은 오히려 "왕비를 잡아 죽여야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10월 6일 새벽, [[정원]] 옆문에 경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시위대를 필두로 사람들은 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궁전에 도달한 시위대는 [[문]]을 보이는대로 때려부수어 왕비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경비병들은 새벽의 급습에 당황하며 방들의 문을 보이는대로 [[가구]]로 틀어막는 난리가 났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오는 아줌마들에게 겁을 잔뜩 먹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녀]]들과 함께 (당대의 기준으로는 매우 수치스럽게도)[* [[19세기]]까지 [[유럽]] 여성은 ([[가슴골]]을 보여주는 것은 미덕이었지만) 절대로 [[발목]]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매우 상스러운 짓이었다. 다리까지 보이면 그야말로 [[창녀]] 확정. 그래서 19세기까지 똥오줌이 굴러다니는 거리를 긴 [[드레스]] 자락으로 쓸고 다니면서 [[치마]] 밑단에 온갖 오물들을 묻히면서도, 발목은 신성불가침일 정도로 가리고 다녔다.] 맨발로 도망쳐 뛰어나가''' [[루이 16세]]의 침실로 갔다. 왕비는 왕의 침실 문 앞에서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시위대가 내는 큰소리 때문에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루이 16세는 한참 동안 왕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시위대가 왕비를 잡아가기 직전에야 겨우 루이 16세가 문을 열어주어서 왕비는 목숨을 건졌다. 부녀자들의 행진의 시작은 파리 [[수산시장]]에서 수십년 동안 [[생선]]을 손질하던 근육질인 아낙들을 필두로 시위가 처음 조직되어서, 가녀린 귀족 여자들과 차원이 다르게 억센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다. '''수십 년 동안 [[클리버]]를 다루던 그녀들에게, 경비병들을 둘러싸서 [[빅장 약관|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기록상으로는 최소 2명이 [[참수]]되어 [[효수]]되었고, 이중 [[이름]]이 확실한 사람은 타티베(Tardivet)였다. 나머지는 심한 [[구타]]를 당하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일단 살아남았다. 이중에서도 이름이 확실한 사람은 묘망드르(Miomandre)가 있다.] 한편 궁궐 경비대는 [[라파예트]] 후작의 병력들과 같이 일한 경력이 있어서 그걸 계기로 연락을 취해 대면해서 시위대를 진정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몇 시간 눈을 붙이던 라파예트 후작이 일어나 이 중재를 성사시켰다. 전날 친분을 다진 라파예트의 병사들의 설득으로 여자들은 궁전에서 나갔지만, 아직도 궁전 건물 밖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는 경비병들을 잡아 참수해서 [[창(무기)|창]] 끝에 효수해서 돌아다니며 잔뜩 살기가 올랐지만, [[스트레스]] 해소가 되어 [[흥분]]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직후 [[라파예트]]의 설득으로 궁의 발코니에서 [[루이 16세]] 본인이 출두하자 군중은 "임금님 만세! (Vive le Roi!)라고 외칠 정도로 기분이 전환되었다. 그러나 직후 군중은 "왕비도 보자"고 요구하고, 방금까지 잡혀 죽을 뻔해서 삐진 왕비가 당당하게 팔짱끼고 [[베란다]]에 서자 백성들은 왕비에게 [[머스켓]]을 조준할 정도였다. 이에 라파예트 후작이 왕비의 옆에 서서 군중이 총을 못 쏘게 자리잡고 있다가 시간을 끌어 흥분을 가라앉히고, 곧이어 귀족들도 왕비를 신임한다는 제스쳐로 왕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남자 귀족이 [[후견인]]이 되자 서서히 민중에서도 "왕비 만세! (Vive la Reine!)"라는 외침이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사태는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